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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함께가면 좋은 대한국인 안중근의사 기념관

국내여행

by * 춘호의 여행일기* 2018. 7. 4.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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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호의 여행일기 (CHUN HO TRAVEL DIARY) 입니다.

 

 

서울특별시 남산자락에 위치한 밀레니엄서울힐튼호텔로 1박2일 가족여행을 다녀왔었습니다.

 

밀레니엄서울 힐튼호텔은 지리적인 위치가 좋아서 많은 분들이 방문하시는 호텔이 아닌가 싶습니다.

 

호텔 셔틀버스를 이용해서 이태원. 동대문. 서울역. 남대문. 명동 등을 방문할수 있어서 좋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좋은점은 남산앞에 위치한 호텔이라 언제든지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남산으로 산책을 가거나 해질녘에 남산 중턱까지 올라가면 상쾌하고 기분이 좋은것 같아서 자주 가게 되는것 같습니다.

 

기회가 되신다면 남산에 위치한 밀레니엄힐튼호텔을 방문하셔서 이곳저곳 관광을 다녀도 좋을듯 싶습니다.

 

이번에는 남산자락에 위치한 안중근의사 기념관 입니다.

 

안중근의사 기념관은 많이 방문했지만 방문할때마다 숙연해지고 아이들과 함께 방문할수 있어서 좋은것 같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편하게 살수있는것도 안중근의사. 유관순누나. 윤봉길의사... 많은 독립운동가 분들 덕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안중근 의사님의 잘린 손을 볼때마가 가슴한곳이 먹먹해지고 눈가에 눈물이 고이게 되는것 같습니다.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으셨던 독립투사 분들에게 항상 감사하며 살아야 겠습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가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하여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기록된 글을보면 안중근의사께서 대한민국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느끼게 되는것 같습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파랑하늘 중간에 우뚝솟아있는 남산의 랜드마크인 남산타워를 한눈에 볼수있어서 좋았습니다.

 

주위의 경치와 조화를 잘 이루고 있는 남산타워는 서울의 관광명소 임에 틀림없는것 같습니다.

 

예전에 TV프로그램에서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 에서 인도 친구들이 나왔을때 남산을 방문한 장면이 나왔었는데, 남산 정상에 올라가 야경을 보는 모습이 정말 아름답다라는 생각이 들었었습니다.

 

저도 조만간 늦은저녁에 아이들과함께 케이블카를 타고 남산에 올라가서 서울야경을 감상해야 겠습니다.

 

 

 

 

안중의의사 기념관 앞에는 안중근의사를 추모하는 내용의 글이 커다란 바위위에 세겨놓았는데 고인돌과 비슷한 모양의 돌탑등이 많이 있었습니다.

 

 

 

 

안중근의사 기념과 입구의 모습입니다.

 

건물에는 안중근의사 순국 108주기를 추모한다는 내용이 걸려있었습니다.

 

 

 

 

안중근의사 기념관은 서울특별시 공공건축부분 최우수상을 수상했다고 합니다.

 

기념관은 2010년 10월 26일 건립되었으며 숭고한 단심으로 겨레의 앞날을 밝혀주신 의사의 웅기를 봉송하며 후세인의 가슴에 길이 전승하고자 이 전당을 세웁니다.

기념관 건립을 가능케 한 국민의 성원과 성금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안중근의사 기념과 관람시간 입니다.

 

하절기 (3월부터 10월까지) 에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이며, 동절기 (11월부터 2월까지) 에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입니다.

 

입장시간은 관람마감 1시간 전까지이며, 휴관일은 1월1일 설날. 추석연휴. 매주 월요일 (공휴일에는 다음날) 입니다.

 

 

 

 

안중근의사 기념관을 건립할때 기부해주신 분들의 명단이 입구에 걸려있었습니다.

 

금호산업. 아시아나항공. KB국민은행. 현대자동차, 우리은행 등과 같은 대기업에서도 기부를 해주셨고, 코리아나 특허연구소, 동아타이어공업. 삼부토건 등과 같은 중소기업, 육군 제30 기계화보병사단. 육군 제1군단. 육균 제1보병사단 등과 관은 군부대와 많은 시민분들의 자발적인 기부를 해주셔서 안중근의사 기념관이 건립된것 같습니다.

 

 

 

 

태극기 앞에 앉아계시는 안중근의사의 모습입니다.

 

저도 어쩔수 없는 한국사람인지라 오래된 태극기만보면 눈시울이 뜨거워지는것 같습니다.

 

 

 

 

안중근의사는 1876년 강화도조약에서 1905년 을사늑약까지 30년간 조선은 국난의 위기를 겪어야 했습니다.

 

임오균변 (1882년), 갑신정변 (1884년), 청일전쟁 (1894년), 을미사변 (1895년), 러일전쟁 (1904년) 등의 격변을 거치면서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 했었습니다.

 

구국을 위한 계몽운동과 의병투쟁에도 불구하고 1905년, 일제에 의해 을사늑약이 강제되면서 한국은 사실상 식민지 상태에 놓이고 말았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이러한 역사의 소용돌이 와중에서 1879년 9월 2일 태어나셨습니다.

 

 

 

 

안중근 사후에 친동생 정근과 공근은 러시아로 망명하여 활동하다가 중국으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큰 활약을 하셨습니다.

 

사촌동생 명근은 친일대신들을 처단하고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자 군자금 모집활동을 펼쳤다고 합니다.

 

그외에 장근, 경근 등 사촌동생들과 봉생, 원생, 진생, 춘생 등 조카들도 만주 독립군이나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광복군에 가담하여 독립운동을 이어갔습니다.

 

 

 

 

안중근의사 가문으로 만든 건국훈장 입니다.

 

안중근의사 가문을 "독립운동가 가문" 이라고 부를 정도로 가문안의 많은 분들이 나라를 위해 활동하셨습니다.

안중근의사 가문에서만 15명의 독립운동가들이 건국훈장을 받으셨습니다.

 

참고로 건국훈장은 우리나라를 세우는데 기여하신 분들게 수여하는 훈장으로 5등급으로 나뉩니다.

각 등급은 당시 독립운동의 참여 정도와 업적에 따라 구분한다고 합니다.

 

1등급 대한민국장. 2등급 대통령장. 3등급 독립장. 4등급 애국장. 5등급 애족장 이 있습니다.

 

 

 

 

안중근의사와 천주교 입니다.

 

1894년 안태훈은 동학농민전쟁 당시 동학군으로부터 노획한 5백석 가량의 양곡을 군량미로 전용한 것이 문제가 되어 곤경에 처하였었습니다.

 

이때 프랑스인 신부의 도움을 받아 문제를 해결한 안태훈은 천주교에 입교하고 1894년 10월 각종 천주교 관련 서적을 가지고 교리사 이종래 (바오로)와 함게 귀향하였습니다.

 

안태훈은 청계동에서 천주교를 전파하기 시작한 이래 2개월만에 인근 7개 마을에 교리를 전파하였습니다.

 

안태훈은 매화동 본당의 빌렘 신부에게 천주교 공소를 청계동에 설치해 줄것을 청하였습니다.

 

1897년 1월 11일 안중근은 빌렘 신부에게 영세를 받고 토마스라는 영세명을 받으셨습니다.

이후 안중근은 빌렘 신부로부터 교리공부와 프랑스말을 배우며 전도활동에 헌신하였습니다.

그리고 전도활동 중 민족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대학설립을 계획하기도 했습니다.

 

 

 

 

안중근의사와 을사늑약

 

1904년 일제의 야욕으로 인해 러일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일제는 전쟁의 명분으로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고 동양의 평화를 이룩한다고 주장했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에서 승리하자 침략의 본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을사늑약을 강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안중근은 이러한 정세 속에서 부친과 의논하여 나라를 구할 방도를 찾으셨습니다.

당시 중국의 상둥, 상하이 등지에서 한국인이 많이 살고 있었는데 안중근은 이곳을 터전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할수 있다고 생각하셔서 항일운동의 터전을 일구기 위해 1905년 6월경 중국으로 출국하셨습니다.

 

 

 

 

대한자강회는 1906년에 만들어진 애국계몽단체 입니다.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연설회를 개최하고 매달 월보를 발행해 국내외 소식과 논설을 실었으며 정부에게 어떤 개혁정치를 해야하는지에 대해 건의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의 부강을 위해 교육을 강화하고 국민을 계몽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한국을 침략하는 일본을 비판하고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대한자강회를 경계했습니다.

결국 대한자강회는 일본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지만 이후 서북학회로 계승해 계몽운동을 유지했습니다.

 

 

 

 

안중근의사 연해주 활동

 

안중근의사는 연해주 각지 한일마을을 순회하며 교육과 실업의 발달을 도모하고 민심 단합을 목표로 계몽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이어 안중극의사는 의병대열에 참여해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독립전쟁을 전개해 나갔습니다.

 

안의사와 그의 동지들은 크라스키노를 근거지로 삼고 국내진입작전을 벌여 나갔습니다.

 

크라스키노를 중심으로 한 국외의병에는 홍범도 같은 국내에서 항쟁을 하다가 망명한 의병도 많았고 연해주 한인사회를 바탕으로 편성된 의병부대도 있었으며 안의사와 같이 국내외에서 계몽운동을 벌이다가 참여한 인물들도 있었습니다.

 

 

 

 

국내 진입작전당시 안중근의사께서 읋었던 애국시 입니다.

 

사나이 뜻을 품고 나라밖에 나갔다가 큰일을 못 이루니 몸두기 어려워라.

 

바라건대 동포들아 죽기를 맹세하고 세상에 의리없는 귀신은 되지 말지어다.

 

 

 

 

안중근의사의 단지한 손가락 입니다.

 

안중근의사는 자신의 힘으로 기필코 조국을 독립시킬 것을 맹세하며 왼손 약지를 끓었습니다.

그리고 그 피로 태극기위에 대한독립 이라는 네 글자를 써 독립에 대한 의지를 천하에 알렸다고 합니다.

 

 

 

 

안중근의사의 하얼빈 의거 계획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의 대장대신 코코프체프와 만나 동양침략정책을 협상하기 위해 북만주를 시찰한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안중근은 이를 나라와 겨례의 원수를 갚을 절호의 기회로 판단하고 우덕순, 유동하 등과함께 하얼빈으로 향했습니다.

 

10월 22일 하얼빈에 도착한 안중근은 신중하게 의거 계획을 세웠다고 합니다.

거사에 만전을 기하기위해 채가구 역은 우덕순과 조도선이, 하얼빈역은 안중근이 맡아 의거를 하기로 했습니다.

 

23일밤 안중근은 의거 결의를 읊은 장부가를 짓고 우덕순도 의거가를 지어 이에 화답했다고 합니다.

채가구역으로 이동하여 25일에 채가구 역에서 의거를 맡은 우덕순과 조도선이 남고 안중근은 하얼빈으로 돌아왔습니다.

 

 

 

 

안중근의사 자서전 "안응칠역사"

 

안응칠역사는 안의사가 1909년 12월 13일 옥중에서 집필을 시작하여 이듬해 3월 15일 탈고한 자서전 입니다.

 

안중근의 탄생부터 순국전까지의 삶의 역정, 민족과 국가를 위하여 투쟁한 사실을 진솔하게 기술했습니다.

32년의 짧은 인생을 오직 겨레와 나라를 위하여 살신성인한 안중근 의사의 모습이 그의 육필기록으로 생생하게 남았습니다.

 

 

 

 

동포에게 독립운동을 권하는 안중근

 

그렇지 않소.

그대는 다만 그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셈이오.

만일 백성이 없다면 나라가 어디 있을것인가.

더구나 나라란 몇몇 대판들의 나라가 아니라 당당한 2천만 민족의 나라인데,

만일 국민이 국민된 의무를 행하지 않고서 어찌 민권과 자유를 얻을수 있단 말이오.

그리고 지금은 민족의 세계인데, 어째서 홀로 한국민족만이 남의 밥이 되어 앉아서 멸망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옳겠소?

 

 

 

 

"동양평화론" 서문 중에서

 

그래서 동양평화를 위한 의로운 싸움을 하얼빈엣서 시작하고, 옳고 그름을 가리는 자리는 귀순으로 정했다.

이어 동양평화 문제에 관한 의견을 제출하는 바이니 여러분은 깊이 살펴주기 바란다.

1910년 경술 2월 대한국인 안중근 뤼순 옥중에서 쓰다.

 

 

 

 

남겨진 유서 동푸에게 고함

 

내가 한국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삼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도달치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이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을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자 유한이 없겠노라.

 

 

 

 

어머님 전상서

 

예수를 찬미합니다.

불초자식은 감히 한 말씀 어머님에게 올리려 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저의 막심한 불효와 아침저녁 문안인사를 못다한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슬처럼 허무한 이세상에서 육정을 못 이기고 이 불초 자식을 너무나 염려해 주시니 후일 천국에서 만나 뵈올 것을 바라며 기원합니다.

 

현세의 일이야말로 모두가 주의명령에 따른 바이오니 마음을 편안히 하옵기를 엎드려 비옵니다.

분도는 장차 신부가 되게하여 주시기 바라오며 후일에도 잊지 마시옵고 천주님께 바치도록 교양해 주시옵소서.

 

이상은 그대요이며, 여쭐말씀은 많습니다만 후일에 천국에서 기쁘게 도 만나 뵈옵겠으니 그때 자세한 말씀을 드리기로 하겠습니다.  가족일동에게 문안도 드리지 못하오니 반드시 주교님을 전심으로 신앙하여 천당에서 기쁘게 만나 뵈옵겠다고 전해주시기 바라옵니다.

 

이 세상사는 정근파 공근에게서 들어주시옵고 반드시 염려를 거두시옵고 마음 편안히 지내시기를 바랍니다.

 

아들 도마올림

 

 

 

 

분도 모에게 보내는 글

 

예수 주님을 찬미하오.

우리들은 이슬과 같은 허무한 세상에 천주님의 뜻으로 배필이 되어 또 다시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서로 헤어지게 되었으나 멀지 않아서 주님의 은총에 의해 천당 영복의 땅에서 영원에 모이려 하오.

반드시 육정을 고려함이 없이 주님의 안배만을 믿고 신앙을 열심히 해서 모친에게 효도를 다하고 두 동생들과 화목하게 지내고 자식들의 교육에 힘쓰고 세상에 처하여 신심을 편안하게 가지시고 후세의 영원의 낙만을 기원할 뿐이오.

 

장남 분도를 신부가 되게 하려고 나는 마음을 결정하고 믿고 있으니 그리알고 천주님에게 바쳐 후세의 신부로 되게 하시오.

할말은 많으나 후일 천당에서 기쁘게 즐겁게 다시 만나 자세히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리라 믿고 기원할 뿐이오.

 

1910년 경술 2월 14일 장부 도마올림

 

 

 

 

홍신부 전상서

 

예수님을 찬미합니다.

자애로우신 신부님이시여 저에게 처음으로 영세를 주시고 또한 마지막에는 많은 노고에도 불구하시고 이와 같은 곳에 특별히 내임하시어 친히 모든 성사를 베풀어 주신 그 은혜를 어찌말로 다 사례할 수 있겠습니까.

 

감히 바라옵건대 죄인을 잊지마시고 주님앞에 기도를 바쳐 주시옵고 죄인임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신부들과 교우 여러분들에게도 문안드려 주시고 아무쪼록 우리가 빨리 천당 영복의 땅에서 기쁘게 다시 만나게 되는 날을 기다린다는 뜻을 전해주십시오.

 

끝으로 자애로우신 나의 신부님이요 저를 잊지마시기를 바라며 저도 또한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1910년 경술 2월15일 죄인 도마올림

 

 

 

 

이곳은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봉환도면 모셔질 자리로 1946년에 조성된 가묘입니다.

 

 

 

 

안중근의사님 감사합니다.

 

많은 분들이 포스트잇에 안중근 의사님께 고마움을 표시해 주셨습니다.

 

 

 

 

안중근의사 기념관에는 안중근의사와 찍은 사진과 편지가 담긴 엽서를 이메일로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저희 아이들도 몇번 해보았는데 메일을 받지는 못했었습니다.

 

아이들에게 추억을 줄수있는 소중한 자료인데 메일이 도착하지 않아서 조금 아쉬웠습니다.

 

 

 

 

대한의사 안중근 선생님의 청동 상 입니다.

 

쿠이유 작품인데 이 작품은 2014년 4월 26일 중국 차하얼학회 한팡밍 주석이 안중근의사 숭모회 기념관에 기증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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